하이쿠 – 기억을 잃은 천재의 두 번째 삶
‘하이쿠(High Q)’는 2024년 ENA에서 방영된 미스터리 스릴러 드라마로, 기억을 잃은 천재 프로그래머가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며 거대한 음모에 맞서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목 ‘High Q’는 주인공의 높은 지능지수(IQ)와 동시에 ‘질문(Question)’을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으로, 기억과 진실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상징한다. 작품은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를 파헤치며, 스릴러와 심리극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준다.
줄거리: 기억을 잃은 천재의 미스터리한 각성
주인공 이도현(이제훈)은 세계적인 AI 연구소의 수석 프로그래머로, 인공지능의 윤리 문제를 연구하던 중 알 수 없는 사고를 당해 모든 기억을 잃는다. 깨어난 그는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왜 병원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뇌에는 해킹 방지용 칩이 심어져 있었고, 그것이 점차 과거의 단편적인 기억을 되살려준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복구하려 할수록, 그 과정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거대한 조직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도현은 자신이 과거에 개발하던 ‘하이큐 프로젝트(High Q Project)’가 인간의 기억을 저장하고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기술은 군사용으로 전용될 위험이 있었고, 그로 인해 그는 조직의 표적이 되었다. 결국 ‘하이쿠’는 단순한 기억 복구물이 아닌, 인간의 정체성과 윤리를 탐구하는 철학적 스릴러로 발전한다.
서늘한 미스터리와 철학적 메시지
‘하이쿠’는 일반적인 스릴러의 속도감보다는 서늘한 긴장감과 지적인 대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기억이 진짜 너를 증명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매 에피소드마다 중심 주제로 등장한다. 특히 도현이 점점 자신의 과거를 알아가면서도 ‘그 기억이 조작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빠지는 장면은 인간의 정체성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보여준다.
드라마는 기억을 통한 인간 통제라는 소재를 현실감 있게 다루며, 기술 발전의 이면에 있는 도덕적 위험을 날카롭게 짚는다. 시청자들은 단순히 주인공의 기억을 찾는 여정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하이쿠’는 단순한 SF 스릴러를 넘어, 현대 사회가 직면한 AI 윤리의 경고문처럼 느껴진다.
완성도 높은 연출과 배우들의 열연
이제훈은 이도현 역을 통해 복잡한 감정선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기억을 잃은 혼란스러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불신, 그리고 진실에 다가갈수록 드러나는 인간적인 슬픔까지 모두 완벽하게 담아냈다. 그의 눈빛 하나만으로도 시청자들은 불안감과 공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한효주가 연기한 천재 신경학자 ‘정윤아’는 차가운 이성과 따뜻한 감성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도현의 유일한 조력자이자 감정적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연출 또한 매우 세련됐다. 어두운 색감과 차가운 톤의 조명이 주인공의 내면 세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플래시백 장면마다 흐릿한 화면 효과를 사용해 현실과 기억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 모든 요소가 합쳐져 시청자는 마치 주인공의 머릿속을 직접 탐험하는 듯한 몰입감을 느낀다.
스토리의 핵심: 기억과 인간성의 경계
‘하이쿠’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기억을 인간의 핵심 정체성으로 보는 관점이다. 도현은 기억을 잃었을 때 자신을 잃었다고 느끼지만, 드라마는 역설적으로 “기억이 없어도 인간은 인간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는 과거의 자신보다, 지금의 선택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게 된다. 마지막 회에서 도현이 “기억은 사라질 수 있어도, 내가 느낀 진심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철학적 핵심을 완벽하게 요약한다.
또한 ‘하이쿠 프로젝트’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시청자들은 인간의 기술적 욕망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세상에서 진실은 누가 정의하는가? 이 질문은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남는다.
결말과 여운
마지막 회에서 도현은 자신의 기억을 완전히 되찾지만, 그것이 조작된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진실보다도 ‘지금의 나’를 선택하며, 자신의 기억 데이터베이스를 스스로 삭제한다. 그가 떠난 연구소에는 단 하나의 문장이 남는다. “High Q, the question remains.” 즉,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열린 결말은 시청자들에게 강한 철학적 여운을 남기며,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끈다.
총평
‘하이쿠’는 단순한 미스터리 스릴러가 아니다. 인간의 기억과 정체성, 그리고 기술의 윤리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전개는 차분하지만, 한 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서스펜스 구조를 유지하며, 감정적 울림과 지적 자극을 동시에 전달한다. 또한 ‘기억이란 결국 우리가 만든 이야기’라는 통찰은 현대 사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을 준다. ENA 드라마 중 가장 철학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을 만큼 완성도 높은 스릴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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